"그 얘기는 안 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게 오늘의 화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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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안심시키려고 넣은 한 줄
어느 교육 자료를 만들면서, 앞쪽에 한 줄을 넣어 뒀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다루지 않을 것을 미리 밝히는 문장이었습니다. 민감할 수 있는 영역이 하나 있었고, “그건 안 건드립니다”라고 먼저 말해 두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거든요.
고객사 검토 의견이 왔습니다. 그 줄을 빼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조금 의외였습니다. 안 하겠다는 약속인데 왜 빼라는 걸까요. 그런데 잠깐 생각하니 바로 납득이 됐고, 저는 거기서 한 걸음 더 갔습니다. 구두로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겠다고 회신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 얘기는 안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 얘기를 오늘의 화제로 올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키는 것과 지킨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행동입니다. 그리고 후자는 종종 전자를 무너뜨립니다.
1. 금지는 화제를 지우지 않습니다
말하기 전,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 그 주제는 없었습니다. 말하고 나면 있습니다. 심지어 “안 다룬다”는 꼬리표가 붙어서, 다른 주제들보다 눈에 더 잘 띄는 상태로요.
그래서 쉬는 시간에 오는 질문이 그쪽으로 옵니다. 강사가 안 다루겠다고 한 그것이 오늘 가장 궁금한 것이 되어 있으니까요.
이건 사람들이 삐딱해서가 아닙니다. 문장의 구조가 그렇습니다. 부정문은 대상을 먼저 불러온 다음에 지웁니다. “분홍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를 들으면 순서상 코끼리가 먼저 옵니다. 지우는 건 그 다음이고, 대개 잘 안 지워집니다.
2. 같은 문장이 회의 첫머리에도 있습니다
이 구조는 강의실보다 회의실에 더 많습니다. 익숙한 문장들일 겁니다.
- “오늘은 책임 소재를 따지는 자리가 아닙니다.” → 방 전체가 책임 소재를 생각합니다.
- “이건 구조조정과 무관한 조사입니다.” → 그 조사는 이제 구조조정 조사가 됩니다.
- “미리 말씀드리지만 예산 얘기는 아닙니다.” → 첫 질문이 예산으로 옵니다.
셋 다 선의로 넣은 문장입니다. 상대를 안심시키려고요. 그런데 안심시키려면 불안의 이름을 먼저 불러야 하고, 그 순간 이미 늦습니다.
대안은 침묵이 아니라 대체입니다. 없앨 것을 말하는 대신 있을 것을 말하는 겁니다.
| 안심시키려던 문장 | 대신 쓸 문장 |
|---|---|
| ”책임 소재를 따지는 자리가 아닙니다" | "오늘 결론은 다음 조치 세 개를 정하는 것까지입니다" |
| "구조조정과 무관합니다" | "이 조사의 결과는 업무 배분 개선안으로만 씁니다" |
| "예산 얘기는 아닙니다" | "오늘은 우선순위만 정하고, 예산은 다음 회차에서 봅니다” |
오른쪽 문장들은 같은 안심을 주면서 금지어를 안 꺼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좋은 게 있습니다. 왼쪽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기 쉬운데(누군가 물으면 결국 다루게 됩니다), 오른쪽은 범위를 정한 진술이라 그대로 지켜집니다.
3. AI에게 주는 지시도 똑같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실무에 더 자주 걸립니다. 프롬프트에 이런 줄, 한 번쯤 쓰셨을 겁니다.
- 과장된 표현은 쓰지 마
- 표는 만들지 마
- 추측해서 채우지 마
그리고 결과를 보면 그중 하나쯤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저는 이걸 오래 “모델이 지시를 잘 못 따른다”로 읽었는데, 지금은 다르게 봅니다. 금지형은 지시로서 약합니다.
이유는 사람에게 통하는 것과 같습니다. “표를 만들지 마”라는 문장은 그 요청의 맥락에 표라는 개념을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정작 무엇을 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 말 것 세 줄을 읽고 나서도 AI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안 정해져 있는 거죠. 빈칸이 남으면 AI는 되묻지 않고 스스로 채웁니다.
그래서 바꿔 쓰면 대개 바로 잡힙니다.
| 금지형 | 대체형 |
|---|---|
| ”과장된 표현은 쓰지 마" | "형용사를 빼고 사실과 숫자로만 써" |
| "표는 만들지 마" | "줄글 세 문단으로 써" |
| "추측해서 채우지 마" | "자료에 없는 항목은 ‘자료 없음’이라고 적어” |
오른쪽이 더 잘 먹히는 건 문장이 정중해서가 아니라 검사할 수 있는 형태라서입니다. “과장하지 마”는 지켰는지 판정할 수 없지만, “형용사를 빼라”는 읽어보면 압니다. 모델 제공사들의 프롬프트 안내가 공통적으로 “하지 말 것 대신 할 것을 적으라”고 권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금지는 상대(사람이든 AI든)에게 빈칸과 화제를 동시에 줍니다. 대체 지시는 빈칸을 없애고 화제도 안 만듭니다.
4. 그럼 “하지 마세요”는 어디에 두나
여기서 오해가 생길 수 있어서 절단선을 하나 긋겠습니다.
저는 이 블로그에서 확정 문서에는 「하지 마세요」가 없습니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승인된 최종본에는 “무엇을 하기로 했는가”만 남고, “무엇을 하지 말라고 했는가”는 지저분한 협상 기록에만 남는다고요. 그래서 금지 사항을 찾아내 복원하라는 게 그 글의 결론이었습니다.
오늘 글은 정반대로 들릴 수 있는데, 사실은 두 글이 한 쌍입니다. 자리를 나누면 바로 정리됩니다.
- 금지는 「내가 알고 있어야 할 정보」입니다. → 반드시 찾아내서 내 손에 쥡니다.
- 금지는 「상대에게 던지는 문장」이 아닙니다. → 나갈 때는 대체 지시의 형태로 바꿉니다.
그러니까 금지는 입력 쪽에 두고 출력 쪽에서 뺍니다. 저 교육 건에서 제가 한 게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다루지 않을 영역은 제 머릿속과 준비 자료에 분명히 있었고, 지금도 그대로 지킵니다. 다만 그 사실을 화면과 입에서 뺐을 뿐입니다.
5. 오늘 바로 확인해 볼 세 자리
첫째, 발표 자료의 도입부. “오늘 다루지 않는 것” 슬라이드가 있다면 한번 보십시오. 그 슬라이드가 진짜 하는 일은 범위를 좁히는 게 아니라, 안 다룰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룰 것만 적어도 범위는 똑같이 좁혀집니다.
둘째, 회의를 여는 첫 문장.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로 시작한다면, “오늘 나갈 결론은 ~까지입니다”로 바꿔 보십시오. 같은 말인데 방 안의 공기가 달라집니다.
셋째, 자주 쓰는 프롬프트의 금지 줄. “~하지 마”가 세 줄 이상이면, 그걸 “대신 이렇게 해”로 바꿔 쓰는 것만으로 결과가 바뀝니다. 줄 수가 줄어들기도 합니다. 금지는 여러 개가 필요하지만 대체 지시는 하나면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마무리
지키는 것과 지킨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리고 상대에게 남는 건 대개 말한 쪽입니다. 지킨 것은 아무 흔적이 없고, 지키겠다고 말한 문장만 기억에 남으니까요. 지우려고 적은 글자도, 결국 적힌 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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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는 갈아타는 것이고, 실력은 실려 가는 것입니다
데이터임팩트 박상훈
AI 글은 많이 읽었는데 여전히 뭘 어떤 순서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10년, 130여 건의 기업 교육 현장에서 정리한 순서 한 장을 담았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도구가 바뀌어도 안 바뀌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 붙일 한 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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