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만 바꾸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일하는방식
- AI활용
- 업무적용
- 생성형AI
들어가며 — 마감 전날 온 연락
4시간짜리 교육 자료를 거의 다 만들어 둔 상태였습니다. 슬라이드 40장, 실습용 데이터, 워크북까지요.
마감 전날 메일이 왔습니다. 자료의 소재로 쓰던 제품 하나가 사정이 생겨 다른 제품으로 바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바뀐 제품 정보는 며칠 뒤에 준다고 했습니다.
첫 생각은 이랬습니다. “그럼 제품 이름만 바꾸면 되나?”
아니었습니다.
1. 우리는 견적을 ‘이름 단위’로 냅니다
무언가 바뀐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은 반사적으로 이렇게 셉니다. 그 이름이 몇 군데 나오지? 열 군데쯤 되나? 그럼 삼십 분이면 되겠네.
일상에서 자주 하는 계산입니다. 그리고 대개 틀립니다.
틀리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가 세는 건 눈에 보이는 이름이고, 실제로 바뀌어야 하는 건 그 이름에 매달려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달린 것들은 어디에도 표시가 안 되어 있습니다.
2. 열어 보니 절반이 넘게 딸려 있었습니다
자료를 한 장씩 열어 봤습니다.
그 제품에는 혜택 규칙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조건을 채우면 혜택이 커지는 장치였는데, 그게 자료 전체를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 실습용으로 만든 가상 거래 데이터는 그 장치가 눈에 보이도록 설계돼 있었습니다.
- 중간의 분석 흐름은 그 데이터에서 나오는 패턴을 따라갔습니다.
- 마지막 결론은 그 패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제품이 바뀌면 이름이 아니라 데이터부터 다시 만들어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세어 보니 40장 중 24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좀 이상한 걸 깨달았습니다. 이게 자료를 못 만들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슬라이드 40장이 서로 아무 상관 없이 따로 놀았다면, 정말로 이름만 갈면 끝났을 겁니다. 하나로 꿰어져 있었기 때문에 절반 넘게 딸려 온 겁니다. 그런데 하나로 꿰는 건 좋은 자료의 조건입니다.
잘 만들어진 것일수록 크게 무너집니다. 이건 자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제 숫자 하나로 짜인 보고서, 타깃 고객 한 명을 상정하고 쓴 기획서, 기준 기간을 정해 두고 돌린 분석도 똑같습니다. 잘 짜였다는 건 하나가 전체를 관통한다는 뜻이니까요.
3. “AI로 다시 만들면 되잖아요”
요즘 이 대목에서 다들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절반은 맞습니다.
다시 만드는 건 정말 빨라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데이터를 새로 짜고 슬라이드를 다시 그리는 데 며칠이 걸렸을 일이, 이제는 몇 시간이면 됩니다.
그런데 순서가 하나 빠졌습니다. 다시 만들라고 말하려면, 무엇을 다시 만들지부터 정해야 합니다.
시험 삼아 이렇게 시켜 보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바로 보입니다. “이 자료에서 제품 A를 제품 B로 바꿔 줘.”
이름은 전부 갈립니다. 논리는 안 갈립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겉보기에 멀쩡합니다. 이름이 안 맞는 자료는 누가 봐도 이상하지만, 이름만 맞고 속이 어긋난 자료는 아무도 못 알아봅니다. 발표 당일까지요.
AI가 못 하는 이유는 성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판단할 근거가 화면에 없기 때문입니다.
- 제품 이름이 한 번도 안 나오는데 그 제품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 장이 있습니다. 마지막 결론 장이 그랬습니다.
- 반대로 제품 이름이 큼직하게 박혀 있는데 지워도 아무 상관 없는 장도 있습니다.
이 둘을 가르는 정보는 슬라이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만든 사람 머릿속에만 있습니다. “이 장은 그 장치 때문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만들 때는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적어 두지 않으니까요. 데이터가 그렇듯이 맥락은 만들 때만 붙일 수 있는데, 정작 만들 때는 그게 맥락인 줄 모릅니다.
며칠 전 글이 안 바꾼 자리에 남의 맥락이 남는 이야기였다면, 오늘은 바꿔야 하는 자리가 생각보다 넓다는 이야기입니다. 방향은 반대지만 원인은 하나입니다. 무엇이 무엇에 매달려 있는지가 어디에도 안 적혀 있다는 것.
그래서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AI는 다시 만들어 줍니다. 무엇을 다시 만들어야 하는지는 안 알려줍니다.
4. 그래서 한 장씩 물어봤습니다
새 제품 정보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지금 있는 자료를 열어 보는 건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한 일은 대단한 게 아닙니다. 슬라이드를 한 장씩 넘기면서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이 장은, 그게 빠져도 살아남나?
그리고 세 칸으로 갈랐습니다.
- 그대로 둬도 되는 장 — 13장. 제품과 상관없는 개념·방법 설명이었습니다.
- 문구만 고치면 되는 장 — 3장. 이름만 나오고 논리는 안 걸린 장이었습니다.
- 데이터부터 다시 만들어야 하는 장 — 24장. 그 혜택 규칙이 흐름을 끌고 가는 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쓴 기술은 없습니다. 코드를 술술 읽는 사람도 아닙니다. 40번 물어봤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지도가 생기니까 그때부터 AI에게 시킬 수 있게 됐습니다. “24장이 이 규칙에 매달려 있으니, 새 규칙에 맞게 데이터부터 다시 만들고 이 흐름을 이렇게 바꿔라”라고 쓸 수 있으니까요.
순서가 이렇습니다. 지도는 사람이 그리고, 다시 만드는 건 AI가 합니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이름만 갈린 자료를 받게 됩니다.
5. 정보가 오기 전에도 할 일이 있습니다
정보를 기다리는 동안 흔히 고르는 선택지가 둘 있고, 둘 다 손해입니다.
하나. 일단 원래대로 완성해 두고 나중에 고친다. 그럼 두 번 만듭니다. 게다가 두 번째는 마감에 쫓기면서 만듭니다.
둘. 정보 올 때까지 손을 놓는다. 다음 주는 이번 주보다 한가하지 않습니다. 늘 그렇습니다.
셋째 길이 있습니다. 정보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안 바뀌는지 가르는 일입니다. 그건 새 제품이 무엇인지 몰라도 됩니다. 지금 자료가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만 알면 되니까요.
그래서 기다리는 동안 두 가지를 해 뒀습니다.
- 위의 지도. 그리고 24장이 각각 어느 부분에서 그 규칙에 걸리는지 표시.
- 새 제품 정보가 오면 제일 먼저 물어야 할 것 여섯 가지를 메일 초안으로 미리 작성.
효과는 정보가 도착한 순간에 나옵니다. 새 제품을 지도에 얹어 보면 그 자리에서 판정이 납니다. 반나절이면 되는 일인지, 사흘이 걸리는 일인지. 그리고 그 판정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또는 “일정을 조정해 주세요”를 그날 안에 말할 수 있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을 헛되게 안 쓰는 방법은 미리 만들어 두는 게 아닙니다. 결정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입니다.
마무리 — 되물어야 할 한 문장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무언가 하나 바뀐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이름을 셉니다. 그런데 실제로 바뀌어야 하는 건 그 이름에 매달린 것들이고, 매달렸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안 적혀 있습니다. 잘 짜인 자료일수록 더 많이 매달려 있습니다.
AI는 이 부분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다시 만드는 일은 빨라졌지만, 무엇을 다시 만들어야 하는지 정하는 일은 그대로 사람 몫으로 남았습니다. 오히려 다시 만드는 게 빨라진 만큼, 잘못 정한 대로 빠르게 만들어지는 위험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그거 하나만 바꿔 주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이걸 먼저 되묻기로 했습니다. 내 일이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 알면 던질 수 있는 질문이고, 여기에 답해 두면 그다음은 AI가 빠르게 해 줍니다.
그게 빠지면, 뭐가 같이 빠지나요?
무료 이북
도구는 갈아타는 것이고, 실력은 실려 가는 것입니다
데이터임팩트 박상훈
AI 글은 많이 읽었는데 여전히 뭘 어떤 순서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10년, 130여 건의 기업 교육 현장에서 정리한 순서 한 장을 담았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도구가 바뀌어도 안 바뀌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 붙일 한 줄까지.
노트북용 데스크톱판과 휴대폰에서 확대 없이 읽히는 모바일판을 함께 보내드립니다. 화면 열람용이라 인쇄는 제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