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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에게 일을 시키려면, 먼저 '일'이 뭔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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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하는 일을 AI에게 설명해 보세요.”

기업 교육 현장에서 이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비슷한 대답이 돌아옵니다. “회의하고요, 메일 쓰고요, 보고서 만들고요.” 조금 더 다듬은 분은 “데이터 정리해서 상사에게 보고합니다” 정도를 덧붙입니다. 흥미로운 건, 직급이 높을수록 이 질문에 더 막힌다는 겁니다. “하루 종일 바쁘긴 한데, 막상 뭘 하냐고 물으면 모르겠어요”라는 답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건 웃을 일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AI를 도입해도 달라지는 게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선 눈치로 통했습니다

자기 업무를 구조화해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일을 못하는 건 아닙니다. 그동안은 그렇게 안 해도 됐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할 때는 모호함이 통합니다. “이거 보고서 좀 정리해줘”라고 하면, 옆자리 동료는 알아서 합니다. ‘이거’가 뭔지, ‘정리’가 어디까지인지, 누구에게 보여줄 건지 일일이 안 말해도 됩니다. 같은 팀에서 일하며 쌓인 맥락, 전에 비슷한 걸 해본 경험, 그리고 한국 직장 특유의 눈치가 빈칸을 채워주니까요.

“전에 하던 대로 해줘”, “알아서 잘 해봐”, “대충 감 잡았지?” — 이 말들이 업무 지시로 성립할 수 있는 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맥락이 두텁게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빈칸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람이 빈칸을 메워주고 있었을 뿐입니다.

AI는 눈치가 없습니다

여기에 AI가 들어오면, 그동안 눈치로 메워지던 빈칸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AI에게는 “전에 하던 대로”가 없습니다. 같은 팀에서 3년째 함께 일한 경험도, 회의 때 스쳐 지나간 맥락도, “팀장님이 그런 스타일 싫어하시잖아”라는 암묵적 기준도 없습니다.

“보고서 써줘”라고 하면, AI는 묻지도 않습니다. 그냥 빈칸을 가장 흔한 값으로 채워 버립니다. 누구에게 보여줄 건지 모르니 가장 범용적인 톤으로, 무슨 목적인지 모르니 가장 무난한 구조로, 어떤 데이터가 근거인지 모르니 일반적인 상식으로 채웁니다. 결과물은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우리 팀의 이 보고서’는 아닙니다.

이 순간 많은 분이 “AI가 아직 멀었네” 하고 돌아섭니다. 그런데 저는 다르게 봅니다. AI가 부족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동안 명시하지 않아도 됐던 것을, AI는 명시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을 뿐입니다.

활동을 나열하는 것은 일을 정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활동 나열 vs 업무 정의 왼쪽: 회의·메일·보고서·발표를 나열한 것은 활동일 뿐 정의가 아니다(회색 ✗). 오른쪽: '보고서 작성'을 대상·목적·기준·범위로 분해한 것이 업무 정의다(금색 ✓). 활동 나열 무엇을 '했는가' "일이 뭐예요?" 회의 참석 이메일 답장 보고서 작성 발표 준비 AI에게는 빈 신호 "대충 알지?"는 통하지 않습니다 업무 정의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같은 업무라도 보고서 작성 대상 누구에게 보여줄 것인가 목적 왜 이것이 필요한가 기준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가 범위 어디까지가 영역인가 AI가 증폭할 수 있는 신호 정의가 있으면 결과가 달라집니다 vs
활동을 나열한 것은 일을 정의한 것이 아닙니다.

“회의 참석, 이메일 답장, 보고서 작성, 발표 준비.” 자기 업무를 이렇게 나열하는 건, 일을 정의한 게 아니라 활동을 나열한 겁니다. 하루의 스케줄을 읊은 것이지, 일의 본질을 말한 게 아닙니다.

일을 정의한다는 건 이런 겁니다. 같은 “보고서 작성”이라도 물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 누구에게 보여줄 것인가 — 팀 내부 공유와 임원 보고는 완전히 다른 보고서입니다.
  • 이 보고서가 필요한가 — 현황 공유인지, 의사결정 근거인지, 문제 제기인지에 따라 구조가 달라집니다.
  •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 무엇이 ‘잘 되고 있다’이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가르는 기준선이 있어야 합니다.
  • 어디까지가 범위인가 — 이번 주만인지, 분기 전체인지, 경쟁 환경까지 포함인지.

이 네 가지를 말할 수 있으면, AI에게 시켜도 쓸 만한 초안이 나옵니다. 말할 수 없으면, 아무리 좋은 도구를 써도 “그럴듯한 평균값”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재미있는 건, 이 분해가 AI를 위한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팀에 새로 합류한 동료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할 때도 본질적으로 같은 일을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사람은 불완전한 인수인계도 경험과 관찰로 메꿔가지만 AI는 그렇지 못한다는 것뿐입니다. AI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영원히 첫날인 동료에게 일을 시키는 것과 비슷합니다. 맥락을 매번 처음부터 건네야 합니다.

AI가 만든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한 발 물러서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보입니다. 자기 업무를 구조화해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AI 때문에 생긴 새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원래 있었습니다. 다만 사람 사이에서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팀원 간 인수인계가 늘 힘든 것도, 부서 이동 후 적응에 몇 달이 걸리는 것도, “그 사람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간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뿌리입니다. 업무 지식이 구조화되어 있지 않고, 특정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AI는 이 오래된 빈칸을 새삼 드러냈을 뿐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AI가 우리에게 기회를 하나 줬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자기 업무를 들여다볼 이유가 생긴 겁니다. “AI한테 시키려면 뭘 알려줘야 하지?” 하고 고민하는 바로 그 순간, 사실은 자기 일의 본질을 처음으로 꺼내 보고 있는 셈이니까요.

AI 리터러시보다 먼저

많은 조직이 “AI 리터러시 교육”을 도입합니다. 프롬프트 작성법, 도구 사용법, 업무 적용 사례. 물론 필요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앞에 한 층위가 더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 글에서 저는 AI가 증폭기이고, 증폭할 정의가 비어 있으면 결과도 빈다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의를 채우려면, 먼저 자기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프롬프트 기법을 배우기 전에, “내 일의 대상은 누구이고, 목적은 무엇이고, 판단 기준은 이것이다”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저는 업무 리터러시라고 부릅니다. AI 리터러시의 전제 조건입니다.

자기 업무를 분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AI에게도 좋은 정의를 건넬 수 있습니다. 도구를 잘 다루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AI에게 일을 시키려면, 먼저 ‘일’이 뭔지를 알아야 합니다. 도구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이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