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X는 작은 DX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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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그 방에 해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있을 법한 장면 하나로 시작하겠습니다.
AI 도입을 검토하는 자리가 열립니다. 실무 부서 몇 곳이 들어오고, 전문가로 초빙된 사람이 앞에 섭니다. 한 시간쯤 이야기가 오간 끝에 결론이 나옵니다. 데이터가 부족하고, 정리도 안 돼 있고, 아직은 이르다.
정중하고 신중한 결론입니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방에서 이런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AI에게 자기 업무를 실제로 한 번 시켜 보고, 그 결과물을 손에 쥐어 본 사람.
논의는 충분했고, 경험은 0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온 “아직 이르다”는 앞으로 1년쯤 그 조직의 공식 입장이 됩니다.
1. 우리는 AX를 DX의 순서로 판정합니다
왜 이런 결론이 나오는지는 사람 문제가 아닙니다. 판정에 쓰는 자가 문제입니다.
지난 10년간 조직이 새로운 기술을 들일 때 쓴 문법은 하나였습니다. 디지털 전환, 흔히 DX라고 부르는 그것입니다. 순서가 정해져 있습니다.
먼저 데이터를 정비합니다. 그다음 프로세스를 표준화합니다. 그 위에 시스템을 올립니다. 그러고 나서야 사람이 씁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순서입니다. 조직이 먼저 갖추고, 개인은 갖춰진 것을 받아서 씁니다. 그래서 이 문법 안에서 “우리도 이제 AI를 써야 할까”라는 질문은 자동으로 이렇게 번역됩니다. “우리 데이터와 프로세스가 그걸 받을 준비가 됐나?”
준비가 안 됐으면 답은 하나뿐입니다. 아직 이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결론이 틀린 추론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문법 안에서는 완벽하게 맞는 답입니다. 문제는 문법 쪽에 있습니다.
2. DX가 그 순서였던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DX의 순서를 낡았다고 깎는 건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순서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시스템은 예외를 다루지 못합니다. 열 이름이 다르면 못 읽고, 빈칸이 있으면 멈추고, 부서마다 양식이 다르면 아예 시작을 못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먼저 세상을 정리해서 시스템이 삼킬 수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 줘야 했습니다.
정비와 표준화는 관료적인 절차가 아니라 기계가 일을 넘겨받기 위한 최소 조건이었습니다. 순서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시스템은 통째로 켜집니다. 결재 시스템을 나 혼자 오늘 반쯤 써 볼 수는 없습니다. 예산이 서고, 승인이 나고, 전사에 깔리고, 그때부터 모두가 씁니다. 그러니 개인이 먼저 해 볼 방법 자체가 없었습니다.
DX에서 개인이 마지막에 오는 건 개인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그 앞을 개인이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3. 생성형 AI는 그 두 전제가 뒤집힙니다
그런데 생성형 AI는 방금 말한 두 가지가 다 뒤집힙니다.
하나 — 지저분한 것을 그대로 받습니다. 양식이 제각각인 회의록, 열 이름이 중구난방인 표, 문단으로 풀어 쓴 메모. 시스템이라면 못 넘겼을 것들을 그냥 넣을 수 있습니다. 정리가 시작의 조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리 자체를 시켜 볼 수 있습니다.
둘 — 통째로 켤 필요가 없습니다. 예산도 승인도 인프라도 없이, 한 사람이 자기 업무 하나를 오늘 시켜 볼 수 있습니다. 시작 단위가 전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한 가지 일입니다.
물론 대가가 있습니다. 지저분한 걸 그대로 받는 대신, 결과가 맞는지는 사람이 봐야 합니다. 시스템은 틀리면 멈추지만 AI는 틀린 채로 그럴듯하게 내놓습니다. 그래서 이 방식은 명령이 아니라 위임에 가깝습니다. 완벽한 입력을 넣고 정확한 출력을 받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맡기고 돌아온 것을 검증하는 쪽에 사람이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서가 반대가 됩니다.
DX는 정리한 다음에 자동화합니다. AX는 시켜 보면서 무엇을 정리할지 알게 됩니다.
이건 정비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비의 자리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앞에 두면 끝나지 않는 숙제가 되고, 뒤에 두면 대상이 정해진 작업이 됩니다. 한 바퀴 돌려 보면 “우리 데이터가 지저분하다”가 “지난달 실적표의 부서명 표기가 세 가지라 걸린다”로 바뀝니다. 앞엣것은 착수가 안 되고, 뒤엣것은 오후에 끝납니다.
무엇을 자산으로 남길지가 모을 때 정해지는 것처럼, 무엇을 정비해야 하는지도 써 보기 전에는 목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4. 그래서 AX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옵니다
이 차이가 실제로 만드는 결과는 이렇습니다.
DX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옵니다. 결정이 먼저 있고, 그 결정이 개인에게 도착합니다. 개인이 할 일은 도착한 것을 익히는 겁니다.
AX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일에서 되는 걸 발견하고, 옆자리가 따라 하고, 팀의 방식이 되고, 그게 쌓여서 조직의 방식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는 아직”이라는 문장이 이상해집니다. 조직이 아직이어도 개인은 이미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개 그렇습니다. 도입 검토가 1년째 진행 중인 회사에도, 자기 보고서 초안을 AI로 잡는 사람은 이미 있습니다.
다만 아래에서 올라온 것은 위에서 내려온 것보다 훨씬 쉽게 사라집니다. 한 사람의 요령으로 남고, 그 사람이 자리를 옮기면 팀에는 아무것도 안 남습니다. 조직이 할 일은 그래서 “시작해도 되는지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것을 보이게 만들고 남기는 것에 가깝습니다.
판정과 정착은 다른 일입니다. 많은 조직이 정착에 써야 할 힘을 판정에 씁니다.
5. “아직 이르다”는 결론은 대개 어디서 나오나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안 된다”는 결론에는 눈에 띄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결론을 낸 사람 중에 직접 시켜 본 사람이 드뭅니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배경이 깊은 사람일수록 그런 결론에 서기 쉽다는 겁니다. 모델과 알고리즘을 아는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이건 그들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보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델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AI는 연구 대상입니다. 무엇을 못 하는지, 어디서 틀리는지, 왜 그렇게 되는지를 봅니다. 그 눈으로 보면 지금 모델은 결함투성이가 맞습니다. 정확히 맞습니다.
일을 맡기는 사람에게 AI는 도구입니다. 오늘 이 일을 얼마나 덜어 주는지, 틀린 건 내가 걸러 낼 수 있는지를 봅니다. 이 눈으로 보면 결함이 있어도 쓸 만한 자리가 넓습니다.
두 사람은 다투는 게 아닙니다. 서로 다른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도입 검토 자리에서 나오는 질문이 두 번째 것인데, 앞에 선 사람은 첫 번째 질문의 전문가일 때가 많다는 겁니다.
활용은 그들의 평가 축에 아예 없습니다. 없는 축을 두고 “거기는 아직”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축을 볼 일이 없었던 겁니다.
같은 일이 계획서에서도 반복됩니다. AX 추진 계획을 열어 보면 모델, 데이터, 인프라, 개발 일정이 촘촘히 적혀 있습니다. 만드는 일은 자세히 적히고,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일은 항목조차 없습니다. AX를 알고리즘과 개발의 문제로 좁히면 정작 성패가 갈리는 자리가 계획에서 통째로 빠집니다. 이건 따로 한 편을 써야 할 이야기라 여기서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리에서는 이 질문 하나가 판을 바꿉니다. “그거 직접 시켜 보신 적 있나요?” 공격이 아니라 축을 확인하는 질문입니다. 안 해봤다는 답이 나온다고 그 사람의 의견이 무가치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의견이 답하고 있는 질문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집니다.
6. 가부는 논쟁이 아니라 아웃풋으로 갈립니다
여기서 가장 실용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AI 활용의 가부는 논쟁으로 안 갈립니다. 회의실에서 두 시간을 써도 안 갈립니다. 한쪽은 사례를 들고 다른 쪽은 한계를 들며, 양쪽 다 맞는 말만 합니다.
갈리는 건 아웃풋입니다.
“그거 검색 수준 아닌가요”라는 말은 논증으로는 절대 안 깨집니다. 더 정교하게 반박할수록 상대는 더 방어적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 일 하나를, 자기가 잘 아는 일 하나를 맡겨서 결과물을 받아 보면, 그 문장은 그 자리에서 사라집니다.
자기가 잘 아는 일이어야 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남의 업무로 본 데모는 감흥이 없습니다. 내가 두 시간 걸려 하던 일이 화면에 나와야 눈이 바뀝니다.
그래서 도입 검토 자리를 설계한다면 저는 순서를 이렇게 뒤집겠습니다. 설명을 30분 줄이고, 각자 자기 업무를 하나씩 들고 와서 그 자리에서 시켜 보게 합니다. 자기 일을 들고 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날 논쟁은 자연스럽게 짧아집니다. 각자 손에 결과물이 하나씩 있으니까요.
한 가지 덧붙이면, 그렇게 받아 든 결과물이 형편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성과입니다. “안 된다”는 결론이 그때는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 되고, 무엇이 왜 안 됐는지가 다음에 시킬 방법으로 남습니다. 안 해보고 내린 “안 된다”에는 다음 수가 없지만, 해보고 내린 “안 된다”에는 있습니다.
마무리 — 드문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AX를 DX의 연장선으로 봅니다. 데이터를 정비하고 프로세스를 표준화한 다음 도구를 얹는 순서, 준비가 안 됐으면 시기상조라는 판정. 그 문법 안에서는 맞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생성형 AI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인프라 없이 개인이 오늘 시작하고, 데이터가 깨끗해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지저분한 채로 맡기고 사람이 검증합니다. 정리는 시작의 조건이 아니라 시작의 결과물입니다. AX는 작은 DX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판단은 논쟁으로 안 갈립니다. 한 번 시켜서 결과물을 손에 쥐면 그 자리에서 갈립니다. 편견을 이기는 건 더 나은 논증이 아니라 한 번의 경험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하고 싶습니다.
AI를 아는 사람은 많아졌는데, AI에게 일을 시켜 본 사람은 여전히 드뭅니다. 모델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과 자기 업무를 맡겨 본 사람은 완전히 다른 집단이고, 두 번째 집단은 아직 얇습니다.
이걸 위협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드물다는 건 그 자리가 아직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조직에서 “그거 제가 해봤는데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없다면, 그 문장은 지금 가장 값이 큰 문장입니다.
그 문장을 얻는 데 필요한 건 자격이나 승인이 아닙니다. 오늘 내 일 하나를 골라서 한 번 맡겨 보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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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는 갈아타는 것이고, 실력은 실려 가는 것입니다
데이터임팩트 박상훈
AI 글은 많이 읽었는데 여전히 뭘 어떤 순서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10년, 130여 건의 기업 교육 현장에서 정리한 순서 한 장을 담았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도구가 바뀌어도 안 바뀌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 붙일 한 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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